한국 연기사의 산증인, 배우 이순재가 25일 새벽 별세했다. 향년 91세. 69년간의 연기 인생을 뒤로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배우 이순재’로 살았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이순재는 서울대 철학과 재학 중 영국 배우 로런스 올리비에의 영화 햄릿을 보고 배우의 길을 결심했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데뷔한 이후, TV와 영화, 무대를 넘나들며 20세기와 21세기를 아우른 ‘현역 최고령 배우’로 활약했다.
그의 연기 인생은 곧 한국 드라마의 역사였다. 1960년대 TBC 전속 배우로 시작해 동의보감, 사랑이 뭐길래, 이산, 허준 등 14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했다. 1990년대 시청률 65%를 기록한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 순재’ 캐릭터는 세대를 초월한 국민적 상징으로 남았다.
연기 변신에 두려움이 없던 그는 70대에도 코믹 연기로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80대에는 리어왕과 같은 고전 연극으로 감동을 선사했다. “배우는 나이를 먹어도 무대에 서야 한다”는 신념 아래 2023년에는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직접 연출하며 창작의 영역까지 넓혔다.
이순재는 예능에서도 특유의 성실함과 인간미로 사랑받았다. 꽃보다 할배(2013)에서 ‘직진 순재’라는 별명을 얻으며 젊은 세대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구순을 넘긴 나이에도 그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2TV 개소리에 출연하며 연기 혼을 불태웠다. 지난해 KBS 연기대상에서는 역대 최고령 수상자로 이름을 남겼다.
한때 정치의 길도 걸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 중랑갑에 출마해 당선됐고, 이후 민자당 부대변인과 한일의원연맹 간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는 잠시였지만, 연기는 평생”이라 말하며 배우로 돌아왔다.
연예계 후배들의 추모도 이어졌다. 정보석은 “선생님의 발자취는 곧 방송 연기의 역사였다”고 했고, 배정남은 “함께했던 시간이 제 인생의 영광이었다”고 적었다. 배우 한지일은 “대한민국 예술계의 큰 형님이 떠났다”며 애도를 표했다.
무대 위에서 쓰러져도 배우로 남고 싶다던 그의 바람처럼, 이순재는 마지막까지 ‘현역 배우’로 살다 갔다.
한국 드라마와 연극의 역사 속에서, 그의 목소리와 눈빛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가 남긴 수많은 대사 중 하나 —
“배우는 오늘 무대에 서지 않으면 내일이 없다.”
그 말처럼, 이순재의 무대는 이제 하늘로 옮겨졌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